관우의 최후와 이릉대전
제74회 ~ 제84회
천하를 울린 관우의 마지막 전투와 맥성의 비극, 복수에 눈먼 유비의 이릉대전, 그리고 백제성에서의 탁고까지 — 촉한의 영광이 무너지는 비극의 서막.
⚔️ 줄거리
관우의 북벌 — 번성 공략과 수공의 위엄
219년, 유비가 한중왕에 오른 직후, 형주를 지키던 관우는 마침내 북벌의 깃발을 올렸다. 목표는 위나라의 요충지 번성(樊城)과 양양(襄陽)이었다. 관우는 형주의 정예병을 이끌고 북상하여 조인이 지키는 번성을 포위했다. 이에 조조는 크게 놀라 명장 우금(于禁)에게 7군(七軍), 약 3만의 병력을 이끌고 번성을 구원하도록 급파했다. 우금의 부장으로는 용맹한 방덕(龐德)이 함께했다.
그러나 하늘이 관우를 도운 것인지, 때마침 가을 장마가 이어지며 한수(漢水)가 크게 범람했다. 관우는 이 물길을 이용한 수공(水攻)으로 우금의 7군을 일거에 수몰시켰다. 수만 명의 위군이 물에 잠기고, 대장 우금은 항복했으며, 부장 방덕은 끝까지 투항을 거부하다 참수당했다. 우금은 위나라의 오대장군(五大將軍) 중 한 명으로 수십 년간 조조를 섬긴 명장이었기에, 그의 항복은 천하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 소식에 조조는 크게 두려워하여 수도를 허도(許都)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까지 논의했을 정도였다. "위진(魏鎮)을 떨게 했다"는 표현은 바로 이때의 관우를 두고 한 말이다. 당시 관우의 위명은 화북 일대를 진동시켰고, 각지에서 관우에 호응하는 반란이 일어날 조짐까지 보였다. 조조조차 그의 위세 앞에 전전긍긍했으니, 관우는 그야말로 무장으로서 일생일대의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여몽의 백의도강 — 형주 기습
그러나 관우가 북쪽 번성에 전력을 집중하는 사이, 뒤에서는 치명적인 위협이 다가오고 있었다. 형주는 원래부터 위·촉·오 삼국이 모두 탐내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오나라 손권은 겉으로는 촉한의 동맹이었지만, 형주를 되찾으려는 야심을 결코 버린 적이 없었다. 오나라의 대도독 여몽(呂蒙)은 병을 핑계로 직위에서 물러난 척하며 관우의 경계심을 풀었다. 후임으로는 무명에 가까운 젊은 육손을 앉혔는데, 육손은 일부러 관우에게 겸손한 서신을 보내 자신을 낮추었다.
이에 속은 관우는 오나라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형주 후방의 수비병까지 번성 전선에 대거 투입했다. 이것이야말로 관우 일생일대의 치명적 실수였다. 여몽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전선(戰船)을 상선(商船)으로 위장하고, 정예 병사들에게 흰 옷을 입혀 상인 행세를 시키며 장강을 건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백의도강(白衣渡江)이다. 오군은 아무런 저항 없이 형주의 각 성을 차례로 접수했고, 여몽은 점령한 성의 백성과 관우 병사들의 가족을 극진히 대우하며 투항을 유도했다. 가족이 안전하다는 소식이 전선에 전해지자, 관우의 병사들은 싸울 의지를 잃고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맥성의 비극 — 관우와 관평의 최후
뒤늦게 형주 함락 소식을 접한 관우는 급히 남하했지만, 이미 퇴로는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다. 앞에는 오나라 군대, 뒤에는 위나라 추격대. 관우의 대군은 순식간에 와해되었고, 겨우 수십 기를 이끌고 맥성(麥城)으로 들어갔다. 맥성은 작은 성에 불과했고, 원군은 오지 않았다.
관우는 아들 관평(關平)과 함께 맥성을 탈출하여 서촉으로 도주를 시도했으나, 오나라 반장의 매복에 걸려 사로잡히고 말았다. 손권은 관우에게 투항을 권유했으나 관우는 단호히 거절했다. 결국 관우와 관평은 219년 음력 12월, 오나라에 의해 참수당했다. 향년 약 58세. 한평생 의리를 지킨 무성왕(武聖王)의 장렬한 최후였다.
관우의 수급은 손권에게서 조조에게 보내졌다. 조조는 평생의 적이자 존경했던 장수의 머리를 받아들고 제후의 예로 후히 장사지냈다. "내가 생전에 가장 두려워한 사람이 바로 운장(관우의 자)이었다"라고 탄식했다고 전해진다.
장비의 죽음과 유비의 분노
관우의 죽음 소식에 유비는 비통에 잠겼고, 장비는 복수에 불타올랐다. 장비는 부하 장수 범강(范彊)과 장달(張達)에게 며칠 내에 흰 갑옷과 흰 깃발을 만들라고 명했다. 기한을 맞추지 못하면 목을 베겠다는 가혹한 명령이었다. 이미 평소에도 부하에게 폭력적이던 장비에 대한 원한이 극에 달한 범강과 장달은, 그날 밤 술에 취해 잠든 장비의 목을 베고 오나라로 도주했다. 도원결의의 세 형제 중 또 한 사람이 허무하게 쓰러진 것이다.
이릉대전 — 유비의 복수전과 육손의 화공
두 의형제를 잃은 유비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제갈량은 "원수는 위나라의 조비이지 오나라가 아닙니다"라며 간했고, 조운을 비롯한 수많은 신하들이 출병을 만류했다. 그러나 유비는 들을 귀가 없었다. 221년 한중 황제로 즉위한 뒤 곧바로 오나라 원정 대군을 편성했다. 연의에서는 75만이라 칭했지만, 실제로는 4~5만 규모였을 것이다. 유비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장강을 따라 동쪽으로 진격했다. 오직 오나라를 멸하고 관우와 장비의 복수를 이루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손권은 처음에 화의를 시도하고 장비를 죽인 범강·장달의 목을 보냈지만, 유비는 거절했다. 궁지에 몰린 손권은 젊은 장수 육손(陸遜)을 대도독으로 임명했다. 육손은 불과 서른 남짓의 나이에 5만 오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오나라의 노장들은 젊은 육손을 무시하고 불만을 품었지만, 육손은 아랑곳하지 않고 침착하게 수비에 집중하며 유비의 예봉을 피했다. 싸워서 이길 수 없으니 시간이 아군의 편이라는 판단이었다.
유비는 장강 남쪽 이릉(夷陵)에서 동쪽으로 700리에 걸쳐 진영을 배치했다. 산림 속에 40여 개의 연영(連營)을 세운 것이다. 제갈량이 이 배치도를 전해 듣고 "누가 폐하에게 이렇게 진을 치라 했는가! 반드시 패할 것이다"라고 탄식했다고 전해진다. 과연 그것은 결정적 실책이었다. 반년간 참을성 있게 대치하던 육손은 마침내 때가 왔음을 간파하고, 222년 무더운 여름밤, 전군에 화공을 명했다. 건조한 바람을 타고 번진 불길은 700리 연영을 순식간에 불바다로 만들었다. 촉한군은 대혼란에 빠져 궤멸당했고, 수많은 장수와 병사가 불길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백제성 탁고 — 유비의 유언
대패한 유비는 간신히 백제성(白帝城)으로 퇴각했다. 이릉의 참패와 두 형제의 죽음, 그리고 수많은 장수와 병사들의 희생에 유비는 병이 깊어졌다. 223년 봄, 죽음이 임박함을 느낀 유비는 성도에서 제갈량을 불러 후사를 부탁했다.
제갈량은 눈물을 흘리며 "신은 감히 고굉(股肱)의 힘을 다하고 충정(忠貞)의 절개를 바쳐, 죽을 때까지 그치지 않겠나이다"라고 답했다. 유비는 아들 유선에게도 "승상(제갈량)을 아버지처럼 섬기라"고 당부한 뒤, 6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도원결의에서 시작된 유비의 파란만장한 여정이 여기서 막을 내린 것이다.
👤 주요 등장인물
📖 정사 vs 연의 비교
자주 묻는 질문
이 콘텐츠는 학습 참고용 요약입니다. 원문·번역본·출판사 해설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의 평가, 사건의 해석, 정사와 연의의 비교 내용은 학자·기관·교재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정확한 내용은 원문 또는 공인된 번역본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